OTT로 <내가 살인범이다> 를 다시 보았습니다.
개봉 당시에도 꽤나 큰 충격을 줬던 영화였지만, 다시 보니 그 안에 숨은 복선과 감정선들이 더 또렷이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닙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법이 놓치는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공소시효라는 제도, 미디어의 자극적인 소비, 그리고 피해자 유족과 수사관의 아픔까지 다룬 이 영화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줄거리 – 살인을 자백한 남자와, 그 자백을 뒤흔든 진짜 범인의 등장
이야기는 15년 전 연쇄살인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총 10명의 여성이 희생되었고, 마지막 피해자인 정수연은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만료됩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형사 최형구(정재영)는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범인이 남긴 칼에 얼굴에 상처까지 입은 그는 세월이 지나도 사건을 잊지 못하고 매일을 살아냅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끝난 2년 뒤, 한 남자 이두석(박시후)이 나타나 자신이 그 살인의 범인이라며 자서전 『내가 살인범이다』를 출간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며 살인 고백을 마케팅 삼아 스타처럼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와 냉소적인 말투에 매혹되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는 ‘유명한 살인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두석은 미디어에도 충실히 출연하며 더욱더 유명세를 달리는 중에 한 생방송에 최형구와 함께 방송을 하면서 열렬히 토론을 하기도 하는 방송이었는데, 방송국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전화를 건 남자는 “이두석은 가짜다. 내가 진짜 살인범이다.”라며 자신을 ‘J’라고 소개합니다.
방송국은 대중의 관심을 더욱 끌기 위해 세 사람의 삼자대면 생방송을 추진합니다.
진범을 자처한 J, 자서전 작가 이두석, 그리고 형사 최형구.
이 세 사람의 대면은 대한민국 전체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진실의 역전 – 가짜 자백과 진짜 범인의 실체
드디어 삼자대면이 있는 생방송 날, 최형구는 처음에 이두석이 범인이고 J는 범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범인만 알 수 있는 범행 내용을 이두석이 알고 있기 때문에 최형구는 이두석이 범인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두석도 본인이 범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에 J는 본인이 진범임을 밝힐 수 있는 증거로서 하나의 동영상을 제시합니다. 바로 정수연이 살아 있었을 때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동영상에서 결정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정수연이 살아 있는 동영상은 처음에 죽은 줄 알았는데 영상속 날짜로 인하여 정수연은 2년을 더 살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현재는 공소시효가 아직 20여분 남아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두석이 살인범이라는 계획은 사실 이두석(다른 피해자의 아들)과 최형구가 진범을 끌어들이기 위한 2년간의 작전이었습니다. 본인대신 다른 사람이 유명세를 타면 분명히 진범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계획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짜로 진범이 생방송에 나온 것이었지요. 게다가 아직 잡을 수 있는 공소시효가 살아있는 증거까지 가지고 말입니다.
결국 J는 얼마 안 남은 공소시효를 피해 도망가고, 최형구와 이두석은 그런 J를 잡으러 갑니다. 서로 죽기살기로 싸워서 결국 진범을 잡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두석이 진범인 줄 알고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려고 했던 정수연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독이 든 만년필을 어머니에게서 빼앗아서 최형구가 대신 진범에게 복수합니다.
그리고 5년의 감옥살이 후 출소하고 그런 그를 정수연의 어머니, 이두석, 그리고 그외의 다른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연기와 감정의 절정 – 정재영의 내면 연기, 박시후의 이중성
이 영화에서 정재영 배우의 연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진범을 향한 증오, 수사 실패에 대한 자책, 그리고 공소시효라는 벽 앞에서 무력함을 견뎌내야 했던 형사로서의 절망이 그의 눈빛과 말투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진범 J를 잡기 위해 2년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계획하고 참았을까요. 그런 최형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정재영 배우에게 정말 전율이 오를 정도였을지도 모릅니다.
박시후 배우 역시 살인범 이두석을 연구할 때는 기존의 부드러운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애 강하고, 쇼맨십에 능한 위선적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소화해 냅니다. 물로 이 또한 연기의 연기였지만 말입니다.
살인범을 흉내 내는 ‘가짜 살인자’로서의 표정과 언행은 오히려 진짜보다 더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사회적 질문
영화는 공소시효와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법이 범죄자를 놓칠 때, 개인의 복수는 정당한가라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최형구가 정수연의 어머니를 대신해 J를 죽이는 선택은 이해가 되면서도 무겁습니다. 유가족의 고통은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이제는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공소시효에 대한 주제 또한 무겁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몇 년만 지나면 그 죄를 물을 수가 없다니, 일반인으로서 너무나도 이해하기 힘든 법 조항이었을 겁니다.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서양처럼 <콜드케이스(미해결범죄사건)>이라는 분류가 없는 것인가? 가 가장 의문인 법관련 의문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문제를 이 영화는 바로 건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으니 정수연이 2년을 살아 있었고, 덕분에 공소시효를 20분 벌었고, 진범을 잡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래서 진범을 잡았지만 아마도 다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못했을지 모르기에 주인공은 그냥 개인적인 복수라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저런 덕분에 지금은 2015년부터는 없어졌습니다. 너무나도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총평 – 10년이 지나도 유효한 메시지, 시대를 앞서간 스릴러
<내가 살인범이다>는 2012년 작품이지만 2025년인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더 날카롭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입니다.
공소시효라는 제도적 허점, 미디어의 선정성과 대중의 무책임한 관심, 그리고 피해자 유족의 절절한 분노까지 한 편의 영화 안에 모두 담아냈습니다. 그 중심에는, 진짜 범인을 끌어내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스스로 법을 어긴 한 남자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반전이 있는 영화가 아닌, 반전 너머에 인간의 분노, 슬픔, 정의감이 살아 숨 쉬는 한국 범죄 스릴러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은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법이 그것을 듣지 않을 뿐이다.”
내가 살인범이다, 이 영화는 지금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